HOME > All

[품절] 말과활 - 13호 - 2017년 봄호
판매가격 : 15,000
적립금 :750
저자 :말과활 편집부
출판사 : 일곱번째숲 [출판사 바로가기]
출시일 :2017-04-11
크기 :240 X 150 mm
페이지 :400
편집 :이혜정
디자인 :안승호
ISSN :2288-3878
구매수량 : 품절된 상품입니다
총 금액 :

책 소개

삼국시대 때 여왕이 있었다고 하지만, 조선왕조는 500년 동안 한 명의 여왕도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는 절대 왕정기에 국가의 틀을 잡았다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나 러시아의 에카테리나 여제 같은 여성 군주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일제 36년 지배를 마치고 대한민국이 건국되었지만, 70여년 가까이 여성 대통령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러던 가운데 탄생한 제18대 대통령 박근혜는 말 그대로 ‘새로운 역사’였다. 

민중시인에서 생명 사상가로, 생명 사상가에서 돌연 ‘깡통’(‘깡통’은 김지하 시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을 싸그리 통틀어 욕할 때 쓰는 말이다)이 되어버린 김지하는 2012년 11월 26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를 지지 선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후보가 이 민주사회에서 대통령되는 게 이상하냐? 이제 여자가 세상 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는 여성들의 현실통어 능력을 인정합니다. 안할 거예요?”
그러던 박근혜 대통령이 국정농단과 뇌물죄로 탄핵을 당하고, 파면된 뒤, 구속 수감되었다. 이 모두(탄핵 ․ 파면 ․ 구속 수감)는 전 ․ 현직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 대통령 재직 중에 일어난 최초의 사례들이다. 이런 꼴을 자청한 듯한 박근혜 대통령이 1만4000년 전에 끊어졌다는 한민족의 모권 왕국 마고성麻姑城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애로운 어머니가 생명과 평화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후천개벽을 열게 될 것이라고 설레발 했던 김 시인은 현재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다. 아마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것이지만, 김지하와 달리『말과 활』은 할 말이 많다. 

통권 13호인『말과 활』2017년 봄호는 특별하게 꾸몄다.『말과 활』은 매 호마다 별개로 기획된 두 개의 특집을 싣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번 호는 “포스트-박근혜와 한국사회”라는 커다한 제목 아래 “[특집1] 최초의, 박근혜를 사유하다”와 “[특집2] 광장과 그 너머의 정치”를 나누어 기획했다. 
워낙 남발되어 ‘포스트post’는 언제부터인가 아무런 것도 의미하지 않는 ‘허사虛辭’처럼 되었다고도 하지만,『말과 활』은 “포스트-박근혜와 한국사회”를 기획하면서 이 단어의 엄밀한 용법에 좀 더 주목했다. “‘포스트’라는 단어가 원래 물리적 시간의 관점에서 ‘이후, 뒤’라는 의미와 윤리적/정치적 관점에서 어떤 대상이나 차원의 ‘그 너머’를 적극적으로 지향하는 ‘탈脫’의 의미가 중첩된 단어”(정용택)라는 것을 감안할 때, 포스트는 ‘박근혜와 한국사회’를 진단하고, 사유하며, 실천하는 데 알맞은 적절한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페미니스트 편집위원들이 기획한 “[특집1]최초의, 박근혜를 사유하다”는 ‘박근혜 정권의 소멸’ 시점에서, 비로소 박근혜라는 문제적 여성 정치인을 둘러싼 대중적 환상과 열광이 그 기원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점에서 ‘최초’에 값하는 박근혜론論들로 이루어졌다. 특집에 참여한 네 명의 필자는 박근혜의 생물학적 성별을 근거로 ‘여성 정치’를 설명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하나같이 거부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이 특집의 필자들은(이진옥 ․ 김주희), 막상 박근혜 앞에서 페미니스트의 언어가 무디어 질 수밖에 없었던 딜레마와, 여성 대통령을 비판할 언어가 미처 준비되지 않았다는 곤경을 조심스럽게 고백한다. 

[특집1]의 첫 번째 필자 이진옥(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은「박근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성 대통령?」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당선되었던 2012년 대선 투표장으로 독자를 데려 간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이후에 이루어진 여러 연구자들의 투표율 분석은 남성보다 여성이 박근혜 후보에게 더 많은 표를 몰아주었다고 확인해 준다. 그런 점에서 제18대 대선의 당락 관건과 관전 포인트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었다고 할 수 있고, 박근혜는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국민적 염원의 유일한 수혜자다(알다시피 통진당의 이정희 후보는 범야당의 승리를 위해 후보 사퇴를 했다). 
좌파 논객들은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박정희의 딸이라는 막대한 정치적 유산에 힘입은 것이라는 게으른 설명을 앵무새처럼 되풀이 하지만, 이진옥은 “최초의 여성 대통령”에 대한 여성 유권자들의 열망에서 ‘민주주의의 결핍democratic deficits’을 발견한다. 박근혜를 찍은 여성 유권자들 가운데 일부는 “분명 수구 ․ 보수적인 정치 권력과 이해관계가 일치한 이들이었겠지만, 다수는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언어화할 수 있는 수단도 기회도 갖지 못한 이들이며, 가부장제와 결탁하여 얻을 수 있는 배당금 이외에는 자원에 접근할 수 없었던 이들”이다. 민주주의 아래서도 민주주의를 누리지 못했던 다수의 여성 유권자들이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투표 행태가 아니겠는가? 

“전쟁 전후에 태어나 가난과 독재 시절에 유년기를 보냈을 여성에게 부모를 비극적 죽음으로 잃은 박근혜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한 것처럼, 어떤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대신하여 ‘딸’ 노릇을 한 경험이 편재해 있을 것이다. 하여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고아, 박근혜에 대한 연민은 실상 그들 자신에게 향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박근혜의 여성을 앞세운 포퓰리스트 정치는 특히 여성 유권자의 심장부, 달리 말해 상실 또는 결핍의 망탈리테를 파고들어 성공한 것일 수 있다.”다시 말해, 여성 유권자들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기대와 열망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정치적 발언권과 시민적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던 ‘3류 시민’의 열망이 투여된 것이다. 

이진옥의 주장이 옳다면, 어쩌면 박근혜가 한국 정치사에 남긴 흔적은 ‘3류 시민=여성’의 반란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증명해 준 증언해주는 사례로 자리매김 될 것이다. 실제로 현재 불붙고 있는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 각 당의 후보들이 앞 다투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세탁하는 진풍경은 ‘3류 시민=여성’의 열망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을 입증해 준다. 
두 번째 필자 허윤(문학 연구가)은「‘목련’의 정치—육영수론」이라는 유혹하는 제목을 가진 글에서, “박근혜 체제를 만들어낸 것은 ‘박정희 신화’로 대변되는 한국 근대화의 초남성적 시스템”이지만, ‘박정희 신화의 초남성적 시스템’의 이면에, “박정희 체제의 내조자,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역시 자리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장기간 집권한 대통령의 배우자이자 한국 영부인의 귀감인 육영수는 내조하는 현모양처이자, 질주하는 유신정권의 ‘청와대의 야당’ 역할마저 감당한 현명하고 자애로운 국모다. 

류진희의 선행 연구를 참조한 허윤은 “육영수가 박정희의 독재 이미지를 희석시키는 동시에 청렴결백한 남성 지도자에 어울리는 현모양처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했으며, 박근혜는 “초남성적 박정희와 여성적 육영수의 권력을 이어받았다”라고 말한다.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은 이 균형 잡힌 권력 재생산의 구도가 작동하였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육영수의 헤어스타일이나 외모를 따라하고 있다는 세간의 분석처럼, 영애가 대통령이 되기까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백목련 같은 영부인’의 이미지 덕분이기도 하다.” 허윤은 육영수 관련 전기와 소설 ․ 사진첩 등, 육영수의 전기적 재현물을 꼼꼼하게 분석 하면서, 육영수 사후, 그녀가 어떻게 ‘명성황후화化’되고, ‘신사임당화化’되어 갔는지를 밝힌다. 흥미롭게도 이 글은 육영수 신화화의 주춧돌을 놓은 장본인으로 박목월 시인을 지목하다(시인들이 자꾸 이러면, 우리들은 이렇게 외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인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다오!’) 허윤은 박목월이 공헌한 육영수 신화를 ‘신성 가족서사’로 규정하면서, 육영수가 신성 가족서사 안에서 맡은 역할은 모성을 지닌 자애로운 어머니였다고 말한다. 오늘도 선거 때마다 “경로원, 고아원 등의 사회복지시설이나 종교시설을 찾아 밥을”하거나 “돌봄 정치”를 하는 후보 부인들에게 육영수는 “남한의 ‘여성 정치인’의 상像”이다.

남성 대권 후보의 아내가 선거운동 기간 동안 서민됨과 모성성, 봉사정신, 돌봄 노동을 끊임없이 과시하면서 유권자로부터 모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국가를 어버이로 상상하는 젠더적 방식에서 기인”한다. 그런 뜻에서 “2017년 한국 정치의 장이 1960년대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박정희와 육영수의 적자가 무너진 지금도, 여전히 공화국 신성 가족 프레임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 목련처럼 스스로를 희생하여 ‘우리’를 부강하게 하는 ‘어머니’ ‘정치’는 근본적으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쯤 가족화되지 않은 방식의 ‘여성’ ‘정치’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포스트 박근혜 체제를 상상하는 데는 이 질문이 필요하다.”

세 번째 글「모성 사기극: 준비되지 않은 여성 대통령과 그 비판」을 쓴 김주희(여성학 연구자)는 국정농단과 뇌물죄로 탄핵 ․ 파면 ․ 구속 수감된 박근혜의 실패를 ‘여자’라는 사실에 전가하는 간편하고도 뿌리 깊은 담론을 공박한다. 공적 담론의 외피를 뒤집어 쓴 저 담론의 가장 망할 사례는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100년 내로는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마라”고 했던 박지원 국민의 당 전 비대위원장의 말이다. 대통령 박근혜의 정치적 무능을 생물학적 성별로부터 추출하고 있는 저 담론은 같은 방식으로 남자 대통령의 실책을 그의 생물학적 성별에 귀착시키지 않는다. 이런 이중잣대는 남자에게는 공적 자리를 배분하면서, 여자에게는 사적 자리만을 허용해왔던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주의적인 역사가 만들어낸 제도적 무의식에 해당한다. 비유하자면 여성 정치인이란, 축구 경기장에 난입한 스트리커Streaker나 같은 것이다. 

“여성의 정치 참여 평가에서 마주하는 곤혹스러움은 동시대 한국 사회에서만 경험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적 이익에 기반한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 부르주아 정치의 효과로서 성차가 고안된 역사 속에서 이러한 문제는 반복되어왔다. 무엇보다 성차와 무관하다고 여겨지는 남성과 달리 성차가 체현된 여성들은 정치적 주체로 간주되지 않았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혁명이 내건 평등의 원리가 여성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에 대항하여 개인성에 입각한 여성의 정치 참여를 주장한 올랭프 드 구즈는 ‘여성이 단두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마찬가지로 여성은 연단에 오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긴 채 자코뱅의 중앙집권주의에 반역했다는 명목으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김주희는 “공적 장에의 여성 진출 비율이 극도로 낮은 한국 사회에서 박근혜 정부 기간은 여성 정치인의 리더십과 부패, 여성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해석하고 비판해야 할지 집단적인 언어의 빈곤을 경험한 시기”라면서, 박근혜를 둘러싼 페미니즘 안팎의 분열적 언어도 함께 분석한다. 박근혜가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 출사표를 던진 1997년, 여성주의자 내지 여성운동 일각에서는 박근혜를 “모성 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자”로 호명하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여성은 곧 자연인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여성 정치의 명백한 퇴보의 순간이었다.” 일단의 여성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준비된 여성 대통령’은 철저하게 생물학적 성별에 근거한 것으로, 박지원의 그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다. 

박근혜가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자였을 때부터 강조했던 ‘4대 악(성폭력 ․ 학교폭력 ․ 가정폭력 ․ 불량식품)’ 척결은 “어머니의 마음으로 가정을 지켜내는 정치” 곧 “모성 정치의 일환”이 분명했으나, 그 정책의 바탕에 깔린 것은 여성 인권에 대한 고려가 아니었다. 예컨대 박근혜 정부는 여성 인권의 문제를 “여성주의 정치학 입장이 아닌 경찰들이 노력해서 뿌리 뽑아야 하는 문제”로 보았다. 이 문제에서 여성가족부는 주체가 되지 못했으니, 박근혜의 ‘모성 정치’는 “절대 악으로부터 내 가정과 국가를 지켜내는 ‘모성의 화신’ 이미지”만 현시한 것이다. 
‘여성 정치’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여성은 태생적으로 모성을 갖고 있는, 태생적으로 깨끗한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자진 존재”로 착각하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의 이러한 ‘모성 사기극’은 국정 운영의 총체적인 무능함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여성 대통령은 모성이 충만한 대통령일 것이라는 “페미니스트적 오독”과 성별주의에 근거한 성차별주의자와 남성 우월주의자가 저지른 <수취인 분명>과 <더러운 잠> 소동은 같은 참호를 구축하고 있다. 

[특집1]의 마지막 글인 시우(문화 연구자)의「페미니스트 미씽: 사라진 논쟁, 거부된 계보」는 ‘여성 대통령론論’ 자체를 검토한다.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성 대통령론은 대통령 당선을 위한 도구적인 정치 마케팅 전략으로 소비되었지만, 여성 대통령론은 박근혜를 위한 일회적인 정치 마케팅 전략으로 폐기될 수 없다. 여성 대통령론은 “여성은 단일한 집단인지, 한국에서 여성이라는 기호는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여성 전체는 대표 가능한지, 여성에 의한 정치와 여성의 정치, 그리고 페미니스트 정치는 어떻게 만나는지, 성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어떠한 정치학을 가능하게 하는지 등 여성 대통령론은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젠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박근혜의 여성 대통령론이 조작된 허구였다는 것은, 허윤과 김주희의 글이 이미 밝혀 주었지만, 이 조작된 신화를 여성 정치의 실체로 간주하고 거듭 헛발질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여성, 여성성, 여성 정치, 페미니즘 일반에 대한 공격으로 치환”하는 사람들이다. 홍성담(풍자화,<골든타임—닥터 최인혁, 갓 태어난 각하에게 거수경례하다>,2012), DJ 산이(시국 풍자 힙합,<나쁜 년Bad Year>,2016), DJ DOC(시국 풍자 힙합,<수취인 분명>,2016), 이구영(<더러운 잠>,2017,풍자화).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여성적인 것에 대한 모욕과 멸시, 조롱과 희화화로 처리함으로써 여성 대통령론을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별에 귀속시킨다. 박근혜로 더럽혀진 공적 자리(국가)에 남성 대통령의 시급한 귀환을 촉구하는 것 이상을 암시하지 못하는 이런 상투적 조롱은, 여성 대통령(론)이 열어 놓은 여성 정치에 대한 사유와 가능성을 봉쇄한다. 
시우는 이 글에서 박근혜를 대통령에 당선시킨 2012년의 ‘여성 대통령론’과 2017년 현재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 모두가 한 입으로 합창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을 비교하면서, 2017년의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이 2012년의 여성 대통령론보다 얼마나 더 젠더 정치적으로 급진화 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이를테면 차별금지법 제정에 반대 의견을 천명한 문재인 민주당 후보의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은 여성 대통령론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은 박근혜의 여성 대통령론과 동일하게 별다른 정치적 의미를 갖지 못했다. 여성 대통령론에서 ‘여성’이 태어날 때 지정받은 젠더 혹은 젠더에 달라붙은 여러 특성(예컨대 공감능력, 모성, 배려, 투명성 등)을 가리키는 기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처럼,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에서 ‘페미니스트’는 가족, 국가, 시장, 이성애규범, 이원 젠더 체계 등을 마땅하고 올바른 제도로 승인하면서, 제도에서 소외되는 ‘여성’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성 대통령론이 지배 구조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면서 다양성의 가치를 확증하고, 성적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서 국민국가, 민주주의, 더 나아가 인간 범주를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는 방향으로 확장되지 못했던 것처럼, 페미니스트 대통령론이 다양한 삶의 영역을 옥죄는 차별과 폭력을 줄여나가고, 규범과 정상성에 맞서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해나가는 데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호해 보인다.” 

박근혜라는 문제적 여성 정치인에 대한 거대한 대중적 꿈이 환상으로 판명 난 이 시점은 필히 환멸을 동반하지만, 박근혜가 환상이었음을 지각할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사유가 잉태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특집1]이 박근혜의 ‘모성 사기극’을 복기하면서 여성 정치의 미래를 모색했다면, “[특집2] 광장과 그 너머의 정치”는 박근혜 환상에 적극적인 소멸을 이끌어낸 광장의 정치와 광장의 정치 너머를 상상해 보고자 한다. 

[특집2]를 여는 백승욱(중앙대 사회학과)의「촛불 항쟁과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의 지속’」은 박근혜 국정농단 사태와 거기에 따른 촛불 항쟁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그런 다음, 최순실의 정체가 처음 밝혀진 때로부터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 탄핵이 통과되기까지의 첫 번째 국면을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이유는 이 첫 국면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떤 특이점이 있었는지 좀 더 세밀하게 살펴두어야 그에 이은 두 번째와 세 번째 국면에서 전개된 일들의 이유와 특징 또한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백승욱은 박근혜 탄핵/촛불 항쟁의 첫 국면에서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한 몫은 크게 없었다고 말한다. 범야당이 박근혜 탄핵/촛불 항쟁의 첫 국면에서 적극적이지 수동적이었던 이유로 “탄핵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더라도 박근혜 정부의 누적된 실정의 결과 차기 대통령 선거에서 ‘정권교체론’은 어렵지 않게 부상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진실은 헤게모니 역능을 잃어버린 제도권 야당의 무능과 무기력증에도 있지 않았을까? 백승욱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탄핵/촛불 항쟁을 주도한 세력은 보수로 분류될 “언론, 검찰, 정치세력”이라고 단언한다. 
“주목할 사건들은 10월 들어 집중되지만, 여기까지 이르게 된 출발점을 거슬러 올라가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급격하게 전개된 첫 기폭제를 찾자면, 그보다 6개월 전의 4 ․ 6 총선의 새누리당 참패를 들 수 있다. 친박의 농단이 이른바 ‘옥새파동’까지 초래하며 집권 세력 일부의 권력 사익화의 민낯이 드러나자, 새누리당은 제1당 지위를 상실했고 이는 보수세력 전체에 심각한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이에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보수 재편 추진 세력은 “생존을 위한 ‘보수 대재편’”과 “관리된 정치 국면을 형성”하기 위해 초기의 촛불 항쟁을 자신들이 기획한 “조용한 궁정쿠테타”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하려고 했다. 

보수의 정치공학은 “『조선일보』와 검찰이 주연으로 등장하고, JTBC 조연,『한겨레』엑스트라, 대중 엑스트라”가 유지되는 한에서만 조작될 수 있었으나, 촛불 항쟁이 벌어지고 있는 광장에서는 “대중의 정치적 주체라는 문제, 즉 ‘民-主’라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무대 주위를 배회”했다. 촛불의 주체였던 민중은 “탄핵 국면의 핵심을 ‘즉각 퇴진’으로 삼으면서 법률 절차인 탄핵과 거리를 두었고, 또 ‘박근혜 체제’라는 구조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었다.” 촛불 대중의 힘이 보수대재편이라는 정치공학적인 구도를 보디 좋게 돌파한 것이다. 

윤여일(동아시아 사상 연구자)의「지금에 대한 발제문」은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필자의 경험담을 생생한 필치로 기록한다. 윤여일은 촛불집회에서 느낀 신바람과 광장의 분투가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 수렴되고 말 결론에 대한 우려를 함께 느낀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신문 펼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뉴스 보기가 즐거워졌다. 식당에 가면 텔레비전이 잘 보이는 자리부터 찾는다. 우리 편이 이기고 있다. 저쪽은 궁지에 몰리고 있다. 이제 차림상을 받으면 될 일인가. 지지후보를 정하고 기대가 실현되길 기다리면 될 일인가.”

사실 이런 우려는 그만의 것이 아니다. 앞서 글을 실은 백승욱 역시 “‘박근혜 체제’의 해체가 야당 대통령 선출로 달성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서, 국회의 탄핵 통과가 이루어진 제1국면의 후반부가 광장에서 점화된 “‘시민 불복종’이나 ‘시민저항’의 쟁점”을 소실시켜 버렸다고 진단한다. 또 이번 호에 권두비평(「직접 민주주의 장으로서의 광장과 민주주의 척도로 등장하는 법 규범: 정치의 지속을 기대하며」)을 맡은 김은실(이화여자대학교 여성학과 교수)은 지난 6개월간 한국사회는 정치적 비상사태를 경험하면서 국가 권력의 부조리한 작동과 함께 “민주주의 사회”에 대해 귀중한 학습을 했지만, “광장은 대의민주주의의 정치적 행위자들을 위한 도구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우려한다. 김은실은 “광장의 목소리는 누가 어떠한 방식으로 듣고, 또 대의 민주주의의 의제로 만들어 가는가? 광장은 대의민주주의를 위한 준비이고 도구인가?”라고 반문하면서 윤여일은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게 아니라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이라면서 “나의 관심은 청와대가 아니라 여전히 광장이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2008년 촛불‘시위’보다 더 진화되었다는 2016년 촛불‘집회’의 비폭력 강박이 왜 불편했는지를 토로한다. 2008년 촛불시위는 이명박 정권이 단순화 시켜 놓은 “‘폭력이냐/비폭력이냐’가 촛불운동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로 부각”되면서, 거기에 좌초했다. 2016년 촛불집회의 비폭력 강박은 2008년의 좌절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학습효과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폭력은 공권력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생긴다는 사고가 이번 광장을 통해 확산되었다면, 그것은 어떤 손실이 아닐까.” 윤여일은 촛불집회의 비폭력 강박으로부터 민중의 지배 능력이 점차 치안권력에 순화되고, 민중의 결정권 또한 사법부에게 판단의 최종심급을 맡겨 정치의 공간이 점차 위축되어 갈지도 모르는 양상을 읽는다. 

필자는 또 다시 우려한다.“이번 대선의 결과는 (지난번만큼) 나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선의 과정 자체가 얼마간 유해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즉 데모스의 힘이 갖는 다양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축소하고 민주주의를 다시금 숫자에 의한 결정으로 환원하고 말지 모른다. […] 우리에게 제공된 선택의 기회는 정작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리곤 한다. 왜 우리의 삶은 이토록 빈곤한가. 왜 우리의 정치는 이토록 협소한 선택지만을 갖고 있는가. 왜 우리의 손에는 1번인가 2번인가, 운동인가 제도인가라는 나쁜 선택지밖에 없는가. 왜 우리의 상상력은 당장 가능한 일로만 제약되고 있는가.”

[특집2]를 닫는 조형래(문학평론가)의「저들의 정치: 박사모, 탄핵 반대의 의식구조」는 탄핵 정국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었던 박사모에 대한 정신분석적 보고문이다. 박사모는 “‘박’(박정희-박근혜)이 곧 국가다” 식의 전근대적 개인숭배에 기초한 사이비 종교적 국가관에 들려 있는 광신도일까? 아니면 특정 세력에 의해 동원되거나 세뇌된 사회적 ․ 문화적 ․ 경제적 취약층일까? 혹은 광신도도 취약층도 아닌, 진짜 조극 근대화와 반공주의라는 신념으로 무장된 멀쩡한 신념인들일까?
문학평론가 조형래는 한국인들이 오랫동안 애독해온『삼국지연의』의 영웅호걸과 조정래의 대하소설 3부작에 자주 등장하는 모리배는 서로 다른 역상逆狀을 보여주지만, 세상을 선악 이분법에 기초한 도덕적 쟁투와 해결로 설명하는 멜로드라마의 필수적인 짝패라고 말한다. 선악의 이분법적 쟁투 끝에 선의 승리를 과시하는 것으로 결말이 나곤 하는 멜로드라마적 상상력과 거기에 충실한 텍스트 일체는 “역사의 발전이나 법과 같은 언어 또는 근대, 자본주의, 국민국가 같은 제도라든가 시스템, 이데올로기 등이 세계를 규율하고 견인해간다는 식의 초월론적 내지는 기계론적 통찰에 전적으로 배치되고 그것을 상쇄하는 인격화된 레벨의 판타지를 부단히 제시”한다. 하므로 멜로드라마적 상상력에 친숙하게 될수록 “소수의 특별한 개인들 내지는 세력의 이해관계에 입각한 계획과 활약”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로 수긍되며, 그것이 “비록 판타지나 자기기만에 불과할지라도, 세상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진실을 통렬하게 체관諦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개인들에게 지극한 위로”가 된다.
친박 태극기 집회에 나온 “소위 어버이 내지는 어르신, 군인 등의 완장을 찬 자로서 행세하는 것, 과장된 확신에 비분강개하는 지사志士” 등은 “세계와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위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공인할 권위를 요청”하고 있는 중이며, “그 권위 내지는 모델의 정점에 바로 박정희/박근혜라는 이름과 미국이 있다.” 이런 단순한 세계관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는 박근혜는 악의 세력에게 모함받은 희생양이며, 헌법과 민주주의의 이상을 운위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오히려 이 수상쩍게 보인다. 이런 멜로드라마적 상황 인식은 박사모 보다 박근혜에게 더욱 깊이 체화되어 있다. 박근혜는 자신의 국정 농단과 뇌물죄 혐의를 원천 부정하면서 어떤 세력에 의해 “엮였다”고 항변하고 있는 바, 박근혜의 이런 항변이 멜로드라마적 토양 위에 자라난 박사모에게 되먹임되고 있는 것이다. 
저들에게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구성해왔던 대의제, 입헌주의, 다수의 추상적 체계와 역사적 경험, 사회학적 상상력의 차원이 결여되어 있다”고 말하는 필자는 “저들에게 정치란 요컨대 세계와 인간을 실질적으로 작동시키거나 규율한다고 믿어지는 근원적인 힘의 행사나 욕망의 관철, 이해득실의 조정 등과 관계되는 원초성의 차원에 귀속된다. 더 범속하게 말하자면 개개인 또는 집단 간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을 ‘기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기 싸움을 통해 각각의 이해득실이나 생존이 결정되었던 소소한 경험에 비추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리해야만 한다는 식의 삶의 방식을 자연스럽게 체득하고 내면화했던 이들이 바로 저들이다”라고 결론 짓는다.

탄핵과 파면에 이어진 박근혜 구속 수감 국면과 맞물려 출간된 이번 호『말과 활』은 특집이 아니면서, 자연스럽게 “포스트-박근혜와 한국사회”를 고민하는 특집이 되어버린 글이 있다. 앞서 소개한 김은실의 권두비평은 광장의 정치가 박근혜 국정 농단 세력과 반反박근혜의 촛불 시민의 구도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젠더의 각축장이기도 했다고 말한다. 초기 촛불집회(제1차, 2차)와 거기에 참여한 촛불 시민 가운데 일부는 박근혜의 국정 농단을 여성 혐오 프레임 없이는 규탄하지 못하는 반페미니스트적/반인권적 구태를 보였다. 하지만 제3차 집회부터 페미니스트들이 “여성혐오, 약자혐오 발언에 경고를 주었고, 집회 진행자 측에 혐오방지 매뉴얼 사용을 권고했고, 집회 진행자 측에서 성추행, 각종 폄하와 혐오 발언에 대한 시정을 약속”함으로써, 광장은 “새로운 정치의 장” “새로운 젠더 정치”의 공론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했다. 
이렇듯 “광장을 통한 한국사회의 학습은 놀라운 것”이지만, 벌린 입에 감 떨어지듯 광장의 힘으로 정권 획득의 기회를 얻은 야당의 유력 대권 후보가 차별금지법 제정에 인색한 것은 지판 받아야 한다. “광장을 광장답게 만들었던 사회적 소수자들의 정치는 정치권의 정책 언어로 전환되고 있다. […] 탄핵 정국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광장이 만들어 내는 소통과 참여의 직접 민주주의 혹은 정치적 자유가 어떠한 방식으로 지속될 수 있는가에 대한 본격적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철학자 문병호(아도르노 저작 간행위원장)의 특별기고「잘못된 전체에서 참된 전체로」는 박근혜 국정 농단 정국을 비중 있게 거론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지배받는 전체가 아닌, 자유로우면서도 상호작용하는 전체가 될 것인가’라는 주제로 “포스트-박근혜와 연결되어 있다. “인류 역사는, 개별 인간과 전체와의 관계에서 볼 때, 잘못된 전체의 전개사”라고 시작하는 이 글은, 전체의 작동에서 중심적인 지배력을 발휘하는 권력이 ‘주술 → 종교 → 군사 ․ 정치 → 자본 → 정보’ 등으로 얼굴만 바꾸어 왔을 뿐, 구체적 존재자인 개별 인간을 전체에 강제적으로 복속시키려는 ‘전체의 지배 형식(이념)’은 더욱 다양하고 공고하게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이런 폭력에 저항하거나 낙오된 개별 인간은 전체로부터 무시되고 배제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가 된다. 예를 들자면, 한국의 교육이 대학 입시라는 전체의 지배 형식에 포박되어 있지 않다면 재수생이 생겨날리 없다. 재수생은 전체의 지배 형식에서 탈락한 낙오자이자, 전체의 지배 형식을 유지하기 위한 본보기(처벌)다. 
2016년 10월에 시작된 촛불집회를 “거짓된 전체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대 다수의 시민들과 거짓된 전체를 계속해서 유지시키려는 집단 사이에 벌어지는 투쟁”이라고 말하는 문병호는 한국사회의 포스트 박근혜를 이렇게 주문한다.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토대로 해서 참된 전체가 어떤 상태인가를 구체적으로 옮길 차례가 되었다. 먼저 개별적인 것과 전체와의 관계에서 볼 때, 참된 전체는 다음과 같은 상태이다. 특별한 것,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개별적인 것이 전체가 설정한 일반성을 강요하는 전체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각기 존재하되, 다른 개별적인 것과 폭력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 관련을 맺으면서도 전체와도 역시 폭력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방식으로 상호작용을 하는 상태가 바로 참된 전체의 상태이다.” 

- -

이번 호 “동시대의 지평”은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작년의 미국 대선과 도널드 트럼프 시대를 분석하는 세 편의 글을 묶었다. 낸시 프레이저는「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언」에서 러스트벨트the Rust Belt의 노동자들이 거부한 것은 신자유주의가 아니라, 마치 형용모순처럼 들리는 ‘진보적 신자유주의progressive neoliberalism’였다고 주장한다. 신사회운동(페미니즘, 반인종주의, 다문화주의,LGBTQ 인권)의 주류적 흐름이 고급스러운 ‘상징적’ 서비스 기반의 비즈니스 분야(월스트리트, 실리콘벨리, 할리우드)와 동맹을 맺으며 전통적인 노동계급과 멀어진 결과, 러스트벨트의 반란이 있었다. 낸시 프레이저는 “좌파의 부재”를 채우기 의해서는 노동과 신사회운동 간의 약해질 대로 약해진 연결고리를 다시 복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트럼프는 클린턴보다 선거자금도, 선거를 위한 실재적 토대 조직도, 주류 언론의 지지도 뚜렷이 뒤졌을 뿐 아니라, 토론회에서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는데도 대통령 선거에서 이겼다. 얀-베르너 뮐러의「한 가족 자본주의」는 트럼프의 승리 비결을 공화당 안의 ‘올드-라이트Old-Right’와 포퓰리즘populism의 결합이 빚어낸 승리라고 말한다. 얀-베르너 뮐러가 지적하는 포퓰리즘에 빠진 유권자들의 정신세계는, 조형래가 멜로드라마 이론으로 살펴본 박사모의 정신세계와 무척 닮았다. 
웬디 브라운의「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은 트럼프의 당선 사태가 “퀴어 및 트랜스 운동,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운동, 이민자 권리 운동”등 “젠더문제를 꽤 다른 측면에서 다루”어온 페미니즘의 ‘제5의 물결’과 무관하지 않다 말한다. 낸시 프레이저가 좌파를 전통적인 노동계층과 유리시켰다고 비판한 ‘신사회운동’과 크게 다르지 않은 페미니즘의 ‘제5의 물결’은 “거세된 계층의 백인남성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든다. 해결을 위한 웬디 브라운의 제안은 낸시 프레이저의 그것과 별다르지 않다. “좌파는 그동안 노동계급을 조직화하는 일을 거의 포기해버렸다. 이는 노동계급을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 속에다 폭스뉴스와 함께 방치해버렸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방치된 노동계급은 반동적이거나 파시스트적인 대중조직의 훌륭한 재료가 될 수 있다. […] 요컨대 우리의 과제는 어떻게 하면 철저하게 소외된 채 분노하고 있는 노동계급에 손을 내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자, 어떻게 하면 정의와 민주주의, 정치행위에 대해 사유하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지난 35년간 모든 정책들을 좌우해온 신자유주의적 합리성neoliberal rationality을 폭로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것이다.” 세 편의 글을 콜로라도 대학 정치학과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김성준씨가 도맡아 번역해 주었다. 

웬디 브라운도 말한 것처럼, 21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인구의 대규모적이고 초국가적인 이동”이다. 이 특징에 주목한『말과 활』은 작년 가을에 나온 11호 혁신호에 “우리 안의 난민1”을 꾸몄고, 이번에 “우리 안의 난민2”가 새로 나간다. 
첫 번째 글을 쓴 강미옥(미국 유타벨리대학교 조교수)은「‘다문화주의’라는 이념적 패러다임」에서 “대한민국은 지난 10년 동안 특히 2008년 보수 정권 이후 ‘다문화사회’라는 이름으로 규정되었고, ‘다문화주의’는 현재 대한민국 현실 사회를 구동하는 주요 이데올로기의 하나로 인정되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다문화 담론은 매우 협소하다. 서구의 경우 용광로melting pot 정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동화주의를 대신한 여러 가지 다문화주의 모델을 실험하면서, 기존의 다문화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여러 가지 경합하는 담론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은 개인과 기업의 자유와 이득을 최대화하려는 시장 다문화주의가 득세한 가운데, 다문화주의를 민족주의와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라는 한국적 특색의 다문화주의 전개가 눈에 두드러진다. 

구번일(비교문학 연구자)의「이해할 수 없는 채로, ‘우리’ - 되기」는 탈북 난민을 주인공으로 삼은 정도상 ․ 김유경 ․ 금희의 소설을 읽는다. 우리 안의 타자 혹은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탈북자들의 ‘우리’에게 구하는 것은 “한국에 ‘속해있다는 느낌’” “한국 사회의 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곧 “은혜”가 아니라 “존중”이다. 하지만 “순수혈통이니 단일민족이니”하는 민족지상주의 신화를 매일 떠받들면서도 탈북민은 ‘우리’에 포함되지 않는다. 탈북민은 남한 사람들이 세금으로 정착비를 주어야 할 사람, 모르는 게 너무 많은 사람, 사회에 짐이 되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아픈 데가 너무 많은 사람, 가부장적 권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우리 속에도 나의 세금을 덜어 주어야 할 사람, 모른 게 너무 많은 사람, 사회에 짐이 되는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등이 있지 않은가? ‘우리’라는 개념이 확대되어야 하는 이유다. 
구번일은 “물리적으로 한국 사회 안에 들어와 있는 모든 이들이 이미 한국 사회에 들어와 있는 ‘우리’”이며, “‘우리’라는 개념이 물리적으로 한 사회 안에 공존하는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된다면 ‘우리’의 안과 밖을 운운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이 데리다의 ‘절대적 환대’이며, 나는 이 장소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물리적으로 먼저 한국 사회 안”에 도착한 ‘유목적 주체’일 뿐이라는 사유가 필요하다. 인구의 대규모적이고 초국가적인 이동이 이루어지는 21세기에는 “그래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타자들과 이웃해 ‘공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페터 슬로터다이크와의 인터뷰 기사「페터 슬로터다이크, 앙겔라 메르켈과 난민 그리고 공포통치에 대해 이야기하다」는 2016년 1월1일 자정, 독일 쾰른에서 벌어진 ‘실베스터의 밤Silvesternacht’ 사건을 논평하면서, 유럽연합에서 가장 많은 아랍계 난민을 받아들인 메르켈 정부를 비판한다. 메르켈의 난민 수용 정책을 ‘자기파괴’적인 처사라고 여기는 슬로터다이크는 “자기파괴에 대한 도덕적 의무 따위는 없습니다”라는 말로 메르켈과 유럽연합의 ‘개방된 국경 정치’를 반대한다. 
한편 이 인터뷰를 글을 번역한 문순표(철학 연구자)의 해제「쾰른은 무엇의 이름이었나」는 슬로터다이크를 공박하는 비판자들의 목소리를 소개는 한편, “어떤 참다운 문명도 이슬람교로는 채울 수 없”다고 말하는 슬로터다이크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오스발트 슈펭글러의『서구의 몰락』등)을 거쳐 최근까지도 면면히 이어지는 독일 보수의 고유한 ‘근대 문명 비판’”의 전통에 기입한다. 
문순표는 짧은 해제를 통해 슬로터다이크가 상상하는 사회의 이미지가 단일한 문화로만 구성된 통합된 몸체이고 여기에 난민이라는 병원체가 외부에서 침입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면서, 이런 인식으로는 “공통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들’이 한데 어울려서 지낼 수 있는 가능성, 이른바 ‘다문화 사회’에 대한 전망은 찾아볼 수 없”게 된다고 비판한다. 

한국에도 외노자(외국노동자)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상당히 있지만, 아직까지는 유럽이나 (트럼프의) 미국처럼 반反이민 정서가 극우주의의 발호로까지 이어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동시대의 지평”에 실린 낸시 프레이저와 웬디 브라운의 글이 미리 보여 주었듯이, 그리고「‘다문화주의’라는 이념적 패러다임」에 강조되어 있듯이, 다문화주의 담론을 숙고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 역시 “정체성의 정치와 분배의 정치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되어야 할 대상임을 분명히 하고, 정체성에 입각한 인정의 정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가 극복되지 않으면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함을 재확인”(강미옥)하는 것이다. ‘’ “” 

이번 호『말과 활』에서 [특집1,2]에 버금가는 무게감을 지닌 두 편의 글은 서동진(계원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 연속기고「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2)」와 권범철(예술과 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의 현장보고「젠트리피케이션, 공통의 부를 둘러싼 전쟁」이다. 서동진은 세 번째 기고한 이번 글에서 현재 문화비평과 사회비평에 쇄도하고 있는 “기분과 정동에 근거한 사회 ․ 문화이론”의 이론 제공자로 하이데거를 지목하고, 아도르노의 입을 빌려 하이데거의 “기분의 유물론”을 비판한다. 서동진이 “돈이 최고라는 추악한 물신적 태도를 비웃으며 진정한 체험을 찾아야 한다고 너스레를 떠는 몸짓은 더더욱 물신적인 것이다”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야마하 피아노는 소리가 깊지가 않다”던 그 분을 떠올릴 독자도 있을 것이다.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학술 논문에서나 찾아볼 수 있던 이 개념이었으니, 언제부터인가 언론매체에 빈번하게 출현하며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일상어가 되었다. 권범철은 2015년 서촌 금천교 시장 젠트리피케이션을 분석한 이 글에서, 소위 ‘뜨는’ 지역은 그 지역에 대대로 축적된 역사적 ․ 문화적 상징자산과 임차인들이 만들어 놓은 지역민 ‘공통의 부’이며, “임대인은 지대를 통해 이 지역화된 부를 차지한다. 임대인을 비롯한 기획부동산업자, 권리금 사업자는 지역화된 공통의 부에 서식하는 기생체들이다.” 권범철은 개정된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젠트리피케이션은 지역화된 공통의 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이번 호『말과 활』은 페미니즘 프레임으로 발견되고 검토된 <더러운 잠> 논쟁(조혜영,「여성의 시선이 닿은 곳: <더러운 잠>과 <국립극장>」), 게임 속의 여성 캐릭터 논의(조아라,「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게임 속 여성 캐릭터 다시 생각하기」), 담론에 대한 반성과 제안(나영정,「‘이미’와 ‘아직’에 대한 정치적인 감각」)을 실었다.


목차

여름으로의 이송 / 안진국
투표 날짜를 받아 놓고 / 장정일
직접 민주주의 장으로서의 광장과 민주주의 척도로 등장하는 법 규범 : 정치의 지속을 기대하며 / 김은실
박근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여성 대통령? / 이진옥
공화국의 가족로망스와 영부인 정치 - 육영수 신화를 중심으로 / 허윤
모성 사기극 : 준비되지 않은 여성 대통령과 그 비판 / 김주희
페미니스트 미씽 : 사라진 논쟁, 지워진 계보 / 시우
‘이미’와 ‘아직’에 대한 정치적인 감각 ; 『말과활』12호 퀴어 특집 토론회 후기 / 나영정
촛불항쟁과 ‘박근혜 없는 박근혜 체제’의 지속 / 백승욱
지금에 대한 발제문 / 윤여일
저들의 정치 : 박사모, 탄핵 반대의 의식 구조 / 조형래
진보적 신자유주의의 종언 / 낸지 프레이저, 김성준 옮김
한 가족 자본주의/ 얀-베르너 뮐러 / 김성준 옮김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 / 웬디 브라운, 김성준 옮김
지바, 죽음의 가도에서 / 허병식
낸과 브라이언 외 2편 / 조동범
오늘의 수상한 유물론들 : ‘기분의 사회학’을 읽는다(2) / 서동진
젠트리피케이션, 공통의 부를 둘러싼 전쟁 / 권병철
‘다문화주의’라는 이념적 패러다임 / 강미고
이해할 수 없는 채로, ‘우리’-되기 / 구번일
페터 슬로터다이크, 앙겔라 메르켈과 난민 그리고 공포통치에 대해 이야기하다 / 페터 슬로터다이크, 문순표 옮김
페터 슬로터다이크, 앙겔라 메르켈과 난민 그리고 공포통치에 대해 이야기하다 해설 / 문순표
중국의 대두와 일본인 ; 양자의 국제감각과 역사감각 / 마루카와 테쓰시, 윤여일 옮김
새로운 통치술로서의 학자금 대출 메커니즘 / 김주환
리셋 추구에서의 반-정치의 정치학을 읽다 / 김신현경
‘네바다이’당한 흑인 빈민 연구 / 장정일
그녀의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은 무엇인가 : 게임 속 여성 캐릭터 다시 생각하기 / 조아라
여성의 시선이 닿은 곳 : 《더러운 잠》과 《국립극장》 / 조혜영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나 없는 / 엄문희
잘못된 전체에서 참된 전체로 / 문병호 


편집위원

김주희 나영정 문순표 안진국 윤여일 이규원
이정민 정시우 정용택 조형래 조혜영 허윤


더 북 소사이어티에서 구입한 도서나 음반을 환불 혹은 교환하시려면 배송 받으신지 일주일 이내에 전화나 이메일로 신청해주세요. 단 커버가 뜯어져 있거나 훼손, 멸실된 경우에는 교환이 되지 않습니다. 단순 변심에 의한 교환은 왕복 배송료를 구매자 분이 부담하셔야 합니다.
기본 배송료는 3,000원입니다. (일부 도서지역 8,000원) 5만원 이상 구매시 배송료는 무료입니다. 단, 부피가 큰 상품은 배송비가 추가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상품 페이지에 별도 기재됩니다.
배송기간은 결제일(무통장 입금은 결제완료 확인일)로부터 2~4일입니다.(토요일/공휴일 제외) 상품이 소량으로 입고되기 때문에, 1일 이내에 입금 확인이 되지 않으면 주문이 취소됨을 알려드립니다.

문의
070-8621-5676, tbs.jungaram@gmail.com
서울특별시 종로구 자하문로10길 22, 201호 (통의동) 2층 우)03044 | 상호: 미디어버스 | 사업자등록번호: 110-16-11810 | 통신판매업신고번호 : 2015-서울종로-0383 [사업자정보확인] | 개인정보관리자: 정아람 | 대표: 임경용
tel: 070-8621-5676 | fax: 070-8621-5676 | email: mediabus@gmail.com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클릭하시면 이니시스 결제시스템의 유효성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클릭하시면 이니시스 결제시스템의 유효성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